1958년 11월 18일자 동아일보에는 짧은 기사가 실렸다. 서울시가 이틀 전부터 미아리 공동묘지 안 무연고 묘를 파내기 시작했고, 이로써 "근 30년의 역사를 가진 서울의 미아리 제2공동묘지는 영영 없어지게 된 것"이라는 내용이다(성북마을아카이브 재수록). 기사에 적힌 숫자는 두 개다. 그동안 묻힌 사람 19,700여 주, 그리고 아직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시가 직접 파내야 할 무덤 13,215기.
이 블로그의 길음동 글들은 지금까지 물, 전기, 연탄, 시장 이야기를 주로 다뤘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무대가 된 땅, 1950년대 후반부터 판잣집과 후생주택이 들어선 길음2동 언덕은 그 전 30년 동안 무덤으로 덮여 있었다. 이번 글은 그 30년을 신문 기사, 2010년 서울역사박물관 보고서, 주민 구술에 나오는 숫자를 서로 맞춰 보며 따라간다. 숫자들이 생각보다 자주 어긋나서, 어긋나는 이유를 따져 보는 것도 이 글의 목적이다.
어디였나: 삼양로 길음119안전센터 맞은편
먼저 이름부터 정리해야 한다. 성북마을아카이브에 따르면 1912년 묘지규칙으로 정해진 묘지 가운데 1번이 미아리 오패산 일대, 2번이 숭인면 미아리 곧 지금의 길음동 일대였다. 흔히 "미아리 공동묘지"라고 뭉뚱그려 부르지만 길음동에 있던 것은 2번, 신문에서 "미아리 제2공동묘지"라고 부른 쪽이다.
보고서 『길음동』(2010)은 위치를 꽤 구체적으로 적었다. 묘지는 길음2동을 중심으로 삼양로 양쪽에 넓게 퍼져 있었고, 들어가는 입구는 지금 삼양로의 길음119안전센터 맞은편이었으며, 입구 근처에 중국인 묘 약 300기가 있었다(98쪽). 2009년에 구술한 이영순 씨는 "여기 미아 초등학교가요 일루 다 공동묘지였어요"라고 기억했다(101쪽). 지금 그 일대를 걸으면 학교와 아파트, 다세대 주택만 보이지만, 지도 위에 이 세 지점(안전센터, 초등학교, 삼양로)을 찍어 보면 묘지의 대략적인 범위가 그려진다.
30년 연표
| 연도 | 일 | 근거 |
|---|---|---|
| 1913 | 경성부가 동부 매장지로 숭신면 미아리 51,555평을 선정 | 매일신보 1913.3.23 (성북마을아카이브) |
| 1917 | 임야조사부에 산34번지 69,000평(숭인면 공동묘지), 산25번지 198,400평(경성부 공동묘지) 등록 | 보고서 97쪽 |
| 1926~1927 | 경성부협의회가 조선인 공동묘지 후보지로 길음동을 검토, 주민과 유지들 반발 | 보고서 97쪽, 동아일보 1927.4.30 |
| 1928.11 | 묘지터 매수와 측량 완료, 조선인 전용 공동묘지 공사 시작 | 보고서 97쪽, 조선일보 1928.11.28 |
| 1930 | 공사 완료, 5월부터 사용 허가. 가족묘 구역을 처음 둠 | 보고서 98쪽, 조선일보 1930.5.20 |
| 1937 | 무덤 약 1만 6천 기, 등급별로 땅값을 받음 | 『조광』 1937.12 (보고서 98~99쪽) |
| 1941~1950 | 주변 주민의 이전 요구, 1950년 국회에서 이전 건의 가결 | 성북마을아카이브(『미아리고개』 79쪽) |
| 1957.12 | 서울시가 연고자 신고 공고, 6개월 기한 | 동아일보 1957.12.9 |
| 1958.11 | 무연고 묘 13,215기 발굴 시작 | 동아일보 1958.11.18 |
연표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반발이 두 번 있었다는 점이다. 1927년에는 묘지가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는 반발이었고, 1941년부터는 묘지를 내보내려는 운동이었다. 같은 땅을 두고 주민의 요구가 정반대로 바뀌는 데 14년쯤 걸렸고, 실제로 무덤이 나가기까지는 다시 17년이 걸렸다. 그 사이 해방과 전쟁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한 번 들어선 기피시설을 옮기는 일이 얼마나 느린지 보여 주는 숫자다.
죽어서도 등급이 있었다: 1937년 땅값
1937년 잡지 『조광』 기자가 묘지 간수 김홍기 씨에게 "여기도 등수가 있습니까?"라고 묻자, 간수는 평당 가격을 줄줄이 불렀다. 보고서가 재인용한 그 대답을 표로 옮기면 이렇다.
| 구분 | 개인묘 (1평) | 가족묘 (1평) | 6등지 대비 |
|---|---|---|---|
| 2등지 | 7원 50전 | 4원 | 15배 |
| 3등지 | 4원 | 2원 | 8배 |
| 4등지 | 2원 | 1원 | 4배 |
| 5등지 | 1원 | - | 2배 |
| 6등지 | 50전 | - | 1배 |
출처: 『조광』 1937년 12월호, 서울역사박물관 『길음동』(2010) 98~99쪽 재인용. 1등지 가격은 기록에 없다. 배수는 필자 계산.
표를 만들어 보면 두 가지가 보인다. 첫째, 가격이 등급마다 거의 정확히 두 배씩 차이 난다(50전, 1원, 2원, 4원). 7원 50전만 이 규칙에서 벗어나는데, 가장 좋은 땅에 웃돈이 붙은 것으로 읽힌다. 둘째, 가족묘는 같은 등급 개인묘의 절반 값이다. 1930년 조선일보는 가족묘를 50평에서 100평 단위로 묶어 내준다고 했으니, 땅을 크게 사는 대신 평당 값을 깎아 준 셈이다. 공동묘지는 원래 땅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제도였는데, 그 안에서도 한꺼번에 넓게 살 수 있는 집안과 50전짜리 땅을 고르는 집안이 나뉘었다.
1937년 돈을 지금 가치로 바꾸는 일은 이번에는 하지 않았다. 통계청 KOSIS의 소비자물가지수는 1965년부터 이어지고, 그 사이에 1953년과 1962년 두 번의 화폐개혁이 있어서 공공 통계만으로는 1937년 1원을 2025년 원화로 이을 방법이 없다. 대신 같은 표 안의 비율이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고 본다.
숫자가 서로 맞지 않는 이유
이 묘지에 관한 숫자는 출처마다 다르다. 넓이부터 그렇다.
| 출처 | 넓이 | 필자 메모 |
|---|---|---|
| 매일신보 1913 | 51,555평 | 경성부 동부 매장지 지정 면적 |
| 임야조사부 1917 | 69,000평 + 198,400평 | 숭인면 묘지와 경성부 묘지를 따로 등록 |
| 조선일보 1928 | 총 14만 평, 실제 묘자리 10만 평 내외 | 매수 완료 시점 |
| 보고서 2010 | 조성 462,000㎡, 1930년대 사용 면적 약 10만㎡ | 462,000㎡는 약 13만 9,750평 |
| 주방신 씨 구술 2009 | "한 3만평" | 10만㎡는 약 3만 250평 |
나란히 놓으면 어긋남이 상당 부분 풀린다. 보고서의 462,000㎡는 1928년 기사의 "14만 평"을 제곱미터로 바꾼 값과 거의 같다. 그리고 1930년대 실제로 무덤이 들어찬 면적 약 10만㎡를 평으로 바꾸면 3만 평 남짓인데, 이는 2009년 주방신 씨(70대)가 기억한 "한 3만평이 전부가 다 찼지요"와 맞아떨어진다. 행정 문서는 사들인 땅 전체를, 주민은 눈으로 본 무덤 구역을 말한 것이다.
무덤 수도 비슷하게 맞춰 볼 수 있다. 1933년 동아일보는 1932년 말까지 미아리 제2묘지에 묻힌 사람을 1,224명으로 적었고, 1937년 간수는 "일만 육천"이라고 답했다. 약 5년 동안 1만 4,800기가 늘었다면 1년에 3,000기, 하루 8기꼴이다. 보고서가 전하는 "하루에 8명이나 9명"과 계산이 맞는다. 1930년대 초 이태원 묘지의 일부가 이곳으로 옮겨진 것(보고서 98쪽)도 이 급증에 한몫했을 것이다.
그런데 1937년 1만 6천 기에서 1958년 실제 발굴 집계 19,700여 기까지는 21년 동안 3,700기, 1년에 200기도 늘지 않았다. 1933년 기사가 이미 경성부 묘지가 "초만원"이라며 망우리 등에 새 묘지를 허가했다고 전하는 것을 보면, 이곳은 1930년대 중반에 사실상 다 찼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이전을 앞두고 1957년 신문에 나온 "약 8만 위", "약 3만 기"는 실제로 파 보기 전의 추정치였고, 마지막에 남은 19,700이 현장에서 센 숫자다.
1958년, 누가 무덤을 옮겼나
1958년 4월 8일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시는 무연고 묘를 전체의 60%로 추산했다. 실제로는 연고자들이 옮겨 간 묘가 6,000여 기, 남은 무연고 묘가 13,215기였으니 무연고 비율은 약 67%로 예상보다 높았다. 4월 초까지 자진 이장은 700여 위뿐이었다.
같은 기사에 그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숫자가 있다. 시가 지정한 인부의 발굴료가 3천 환, 관과 영구차 수송비가 약 1만 5천 환으로 한 기를 옮기는 데 최소 2만 환대가 들었다. 반면 시가 이전 예산으로 요청한 1억 환은 시의회에서 4천만 환으로 깎였다. 이 4천만 환을 실제 무연고 묘 13,215기로 나누면 한 기에 약 3천 환, 발굴료 하나와 비슷한 금액이다. 가족이 직접 옮기면 2만 환, 시가 옮기면 3천 환. 가난한 연고자 입장에서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시에 맡기는 쪽이 훨씬 싼 구조였다. 무연고 비율이 예상보다 높았던 데에는 이 비용 차이도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파낸 자리에 지은 집
이장이 끝났다고 땅속이 비워진 것은 아니었다. 보고서에 실린 2009년 구술은 집을 지을 때마다 뼈가 나왔다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정재웅 씨(1923년생)는 "파제끼면 사람 뼉다구도 많이 나오고 그랬어"라고 했고, 홍순원 씨(80대)는 주인이 나타나지 않은 무덤을 결국 "불도저로 다 밀어버렸어"라고 기억했다(101~102쪽).
김찬수 씨(1927년생)의 구술은 숫자로 읽을 수 있다. 30평이 넘는 자기 집터에만 "한 십 여 산소"가 있었다고 했다. 30평에 10여 기라면 한 기에 3평 안팎이다. 앞에서 본 1937년 무렵 10만㎡에 1만 6천 기를 나누면 한 기에 약 6.3㎡, 1.9평이다. 한 집 마당의 기억과 묘지 전체의 평균이 같은 자릿수에 들어온다. 김보름 씨(1925년생)는 바위를 깨서 집을 지은 덕에 "우리 집은 뼈다귀가 안 나와"라고 했는데, 돌산과 묘지가 섞여 있던 길음동 지형을 생각하면 집마다 경험이 달랐던 것도 이해가 된다.
중국인 묘에 대한 기억도 따로 남아 있다. 김창원 씨(1935년생)와 정재웅 씨는 집터를 정리할 때 중국 동전이 나왔다고 했고, 이종환 씨(1941년생)는 중국인 묘가 붉은 벽돌로 작은 집처럼 지어져 있었다고 기억했다(101쪽). 보고서가 적은 입구 근처 중국인 묘 약 300기와 연결되는 대목이다.
기록을 맞춰 보다 고친 것들
자료를 대조하다 보니 출처끼리 다르거나 이 블로그의 예전 글과 다른 부분이 나왔다. 확인된 범위에서만 적는다.
- 이장지: 보고서(98쪽)는 1957년 서울시가 묘지를 경기도 파주 광탄면 용미리와 고양 벽제읍으로 옮기겠다고 발표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1957년 12월과 1958년 11월 동아일보는 이장지를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반포리로 적었다. 이 블로그의 원주민들의 농사와 생계 Part.2는 "1957년에 고양군 벽제로 이장되었다"고 썼는데, 당시 신문 기준으로는 1957년은 공고, 1958년은 발굴이고 무연고 묘의 행선지는 언주면이었다. 참고로 서초구청 기록상 지금의 서초구 반포동은 옛 시흥군 신동면 반포리여서, 언주면 반포리와는 다른 곳이다.
- 최학송(서해): 보고서(100쪽)는 소설가 최학송이 26세로 요절해 1944년 미아리 묘지에 안장되었다고 적었지만, 성북마을아카이브는 1932년 7월 9일 사망(동아일보 1932.7.10 부고)과 1935년 묘비, 1958년 9월 25일 망우리 이장(경향신문 1958.9.21)을 근거와 함께 제시한다. 이 글은 성북마을아카이브 쪽을 따랐다.
- 안장 인물: 보고서는 이 밖에도 여러 독립운동가와 예술가를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힌 인물로 꼽는데, 이번에 따로 확인하지 못해 다루지 않았다. 다만 시인 이상의 유해가 이곳에 묻혔다가 자취를 잃었다는 대목에서, 누이 김옥희가 남긴 "지금은 온통 집이 들어서 버렸으니"라는 문장은 이 동네의 변화를 가장 짧게 요약한다(100쪽).
이어 읽기
묘지 시절 주민들이 비석을 깎고 봉분을 쌓으며 생계를 꾸린 이야기는 길음동 사람들의 생계와 생업 Part.1에, 묘지 자리에 들어선 산동네가 연탄을 때던 이야기는 길음동의 난방과 조리 이야기에 있다. 박완서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 이 묘지의 암매장 장면을 그렸다(보고서 99쪽). 이 동네를 거쳐 간 문인들 이야기는 길음동과 돈암동: 예술가들의 은신처에서, 1945년 이후 인프라 변화 전체는 길음동 생활사 데이터 연표에서 이어 볼 수 있다.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길음동』(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2010, 97~102쪽 (e-book): https://museum.seoul.go.kr/CHM_HOME/ebook/ecatalog.jsp?Dir=409&catimage=
-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길음: https://museum.seoul.go.kr/archive/archiveNew/NR_archiveList.do?ctgryId=CTGRY404&type=A
- 성북구청 성북마을아카이브, 이야깃거리 "미아리 공동묘지"(2020 작성, 매일신보 1913, 동아일보 1933·1957·1958, 경향신문 1957·1958 기사와 『미아리고개』 2014, 『성북구지』 1993 인용): https://archive.sb.go.kr/isbcc/home/u/story/view/587.do
- 성북구청 성북마을아카이브, 이야깃거리 "최학송"(2020 작성): https://archive.sb.go.kr/isbcc/home/u/story/view/435.do
- 서초구청, 반포동의 지명유래: https://www.seocho.go.kr/site/seocho/05/10502040400002015070810.jsp
구술자 이름과 출생연도, 구술 날짜는 위 보고서에 적힌 그대로 옮겼다. 면적 환산은 1평 = 3.3058㎡ 기준, 비율과 1기당 금액은 필자 계산이다. 보고서와 아카이브의 사진·지도는 재사용 조건을 확인하지 못해 싣지 않았다. 원문은 위 링크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