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성북구 길음동의 난방과 조리 이야기 - 따뜻하게 몸과 마음을 녹이다

과거의 난방과 조리 방식

해방 이전, 길음동의 주민들은 주로 나무나 솔방울을 땔감으로 사용하여 난방을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마을 사람들은 산에 있는 나무를 직접 자르거나 땔감 장수에게서 나무를 구입하여 사용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부엌 아궁이에 땔감을 넣어 불을 때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전쟁으로 인해 산이 폐허가 되고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난방 방식이 변화했습니다. 이제는 나무를 직접 자르는 것보다 땔감 장수로부터 나무를 사서 사용하는 일이 늘었습니다. 난방을 위해 주로 소나무나 슬금나무 등을 사용했는데, 이것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연탄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난방의 진화: 연탄 아궁이와 보일러의 등장

1950년대 중반에는 길음동 사람들이 직접 혹은 전문가를 불러 연탄 아궁이를 설치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기술이 부족하여 방 한가운데나 아랫목만 따뜻하게 되는 문제가 있었죠. 또한, 연탄가스가 빠져나가는 굴뚝을 지붕보다 낮게 설치하는 바람에 사망사고도 발생했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겨울을 대비해 자신의 집 마당에 연탄을 쌓아두기도 했지만, 어려운 이웃들은 하루에 한 장씩 연탄을 사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연탄 아궁이로 인해 사고도 많이 발생했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난방의 혁신: 보일러와 가스

1970년대부터는 연탄보일러가 보급되기 시작했고, 1980년대 후반에는 기름보일러가 등장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는 가스보일러가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기름보일러와 연탄보일러는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연탄보일러를 사용하던 사람들은 기름보일러를 거쳐 가스보일러로 전환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주변 환경뿐만 아니라 생활 패턴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연탄 아궁이에서 난방과 조리를 하던 것이 기름보일러와 가스레인지로 바뀌었으며, 이로써 생활의 편리함과 안전성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조리 방식의 혁신: 석유곤로와 전기밥통

전통적인 주방에서는 연탄이나 나무를 사용하여 요리를 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초반에는 석유곤로가 등장했고, 이어서 석유곤로에 사용되는 석유가 판매되기 시작했습니다. 집에 석유곤로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이를 통해 요리에 필요한 열을 공급하면서 생활의 편의성을 높였습니다. 또한, 석유곤로와 함께 가전제품으로 전기밥통이 등장했는데, 이는 밥을 짓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보온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가전제품들은 생활의 편의성을 크게 높였으며, 점차적으로 사용이 보편화되었습니다.

현대의 주방: 가스레인지와 전자제품

1980년대에는 LPG 가스를 사용하는 가스레인지가 등장했고, 각 가정에 냉장고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대에는 전자레인지가 보급되면서 레인지를 사용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또한, 전자레인지와 함께 전기밥솥도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의 주방에서는 가스레인지와 전자레인지, 전기밥솥 등이 표준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요리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크게 절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26년 보강: 보고서 원문과 서울 통계로 다시 읽은 길음동의 불

위 글은 2024년 5월에 서울역사박물관 조사보고서 『길음동』(2010)의 '난방과 조리' 대목을 읽고 짧게 정리한 기록입니다. 2026년 10월에 보고서 155~157쪽을 다시 대조해 보니 오타 몇 군데와 기름보일러 등장 시기 착오가 있었습니다. 본문은 보고서로 확인되는 부분만 바로잡았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리고 2024년 글에 빠져 있던 질문, 곧 길음동의 불이 왜 그 순서로 바뀌었는지를 주민 구술과 서울 전체 통계를 함께 놓고 따져 봤습니다.

땔감에서 도시가스까지, 길음동 난방·조리 연표

보고서에 흩어져 있는 연도를 한 표로 모았습니다. 시기 구분은 보고서 서술을 따랐고, 표는 제가 직접 정리했습니다.

시기난방조리보고서 쪽수
해방 이전뒷산의 나무와 솔방울, 땔감 장수에게 산 나무를 부엌 아궁이에 땜아궁이에 건 솥155~156쪽
6·25 이후산이 황폐해지고 사람이 몰려들면서 땔감을 사서 쓰는 집이 늘어남같음156쪽
1950년대 중반주민이 직접 또는 기술자를 불러 연탄아궁이 설치연탄불156쪽
1970년대연탄보일러 보급 시작연탄곤로, 이어서 석유곤로156~157쪽
1980년대연탄보일러 사용 지속LPG 가스레인지 등장, 냉장고 보편화157쪽
1980년대 후반기름보일러 등장, 연탄보일러는 사라짐156쪽
1990년대 초반가스보일러 보급 시작156쪽
1990년대 후반가스보일러 보편화전자레인지·김치냉장고·오븐 등(1990년대 이후)156~157쪽

연탄아궁이가 남긴 두 기억: 반쪽짜리 온기와 연탄가스

1950년대 중반 길음동에 퍼진 연탄아궁이는 대부분 전문 시공이 아니었습니다. 보고서는 기술이 부족해 방 가운데나 아랫목만 따뜻했고, 굴뚝을 지붕보다 낮게 내는 바람에 연탄가스로 질식해 숨지는 일이 많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1933년생 이순자 씨는 손으로 작은 원을 그리며 방이 "이만큼 밖에 안 따뜻해"라고 말했습니다(2009년 3월 4일 구술). 같은 구술에는 구들 틈으로 연탄내가 새어 들어와 방을 기어 나와 마당에서 쓰러졌다가 살아난 이야기도 나옵니다. 1957년생 유종덕 씨의 기억은 더 짧고 무겁습니다. "연탄가스로 많이 맡고 옆의 사람들 많이 죽어나가고 그랬어요"(2009년 8월 26일 구술).

제가 보기에 이 두 문제는 뿌리가 같습니다. 서울역사아카이브의 길음 소개 글에 따르면 사람들이 미아리 공동묘지 자리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것이 1950년대 중후반이고, 전국에서 올라온 사람들의 무허가 간이 주택이 빠르게 들어찼습니다. 연탄아궁이가 퍼진 시기와 산동네가 만들어진 시기가 겹칩니다. 서둘러 지은 집에 서툴게 놓은 구들은 열을 고르게 나르지 못했고, 같은 틈으로 가스가 샜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같은 보고서의 의료 대목(160쪽)에는 병원과 약국이 드물어 연탄가스를 마시면 민간요법으로 김치 국물을 마셨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당시 의원 사정은 길음동의 옛 의료 문화 글에 따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연탄을 사는 방식도 형편에 따라 갈렸습니다. 여유 있는 집은 겨울을 앞두고 마당에 연탄을 몇 백 장씩 쌓아 두었고,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집은 하루에 한 장씩 사 들고 들어갔습니다. 같은 골목에서도 한 집에는 연탄이 겨울을 버티는 비축 연료였고, 다른 집에는 그날그날 사는 소모품이었던 셈입니다.

세 번 바뀐 보일러, 그리고 짧았던 기름보일러 시대

1932년생 송호석 씨는 길음동의 난방 변화를 아궁이에서 연탄보일러, 기름보일러를 거쳐 가스보일러로 정리하면서 "세 단계를 다 거쳤다는 거야"라고 말했습니다(2009년 3월 9일 구술). 1941년생 정순용 씨는 1970년대 초 '새마을 보일러'라 불린 연탄보일러가 "하루에 20개" 나갈 정도였다고 기억합니다(2009년 7월 13일 구술). 그리고 1980년대 후반 기름보일러가 나오면서 연탄보일러가 사라졌다고 덧붙였습니다.

2024년 글에는 기름보일러가 1960년대 후반에 등장했다고 적혀 있었는데, 보고서 156쪽과 정순용 씨 구술 모두 1980년대 후반입니다. 그래서 위 본문을 고쳤습니다. 이 연도를 바로잡고 나면 흐름이 분명해집니다. 기름보일러가 1980년대 후반에 들어오고 도시가스가 1990년대 초에 들어왔으니, 길음동의 기름보일러 시대는 길어야 10년 남짓이었습니다. 송호석 씨는 1990년대에도 도시가스가 한꺼번에 들어온 것은 아니고 새로 집을 짓는 집 등 일부부터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재개발과 신축이 연료 전환의 속도를 정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서울 전체 통계와 나란히 놓으면

길음동만의 가구 통계는 보고서에 없습니다. 그래서 서울연구원이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를 바탕으로 정리한 서울 전체의 1975년, 2010년 수치를 옆에 놓아 봤습니다. 두 해의 조사 항목이 '주택연료'와 '난방시설'로 다르다는 점은 원자료에도 주석으로 달려 있습니다.

1975년 주택연료가구 수(비율)2010년 난방시설가구 수(비율)
연탄1,333,375 (95.1%)도시가스 보일러2,776,529 (79.2%)
가스37,864 (2.7%)지역난방387,993 (11.1%)
석유22,315 (1.6%)중앙난방290,062 (8.3%)
전기7,133 (0.5%)기름 보일러25,435 (0.7%)
나무·짚 등1,005 (0.1%)연탄 보일러·아궁이4,030 (0.1%)
합계1,401,994합계(재래식 아궁이 16가구 포함)3,504,681

세 가지가 눈에 띕니다. 첫째, 1975년 서울에서는 20가구 중 19가구가 연탄을 땠습니다. 길음동의 연탄 생활은 특별한 가난의 표시라기보다 당시 서울의 표준이었습니다. 다른 점은 연탄을 어떤 집에서, 어떤 굴뚝으로 땠느냐였습니다.

둘째, 1975년 통계에서 석유는 1.6%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길음동 주민들은 1970년대에 거의 모든 집이 석유곤로를 썼다고 말합니다. 이 차이는 1935년생 김창원 씨의 말로 풀립니다. "연탄으로 난방하고, 밥만 그걸로 하고"(2009년 3월 4일 구술). 석유는 밥 짓는 연료였고 방을 데우는 연료는 여전히 연탄이었습니다. 집의 주 연료 하나만 묻는 통계로는 한 부엌에 연료가 두 가지였던 생활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구술 기록이 통계의 빈칸을 채워 주는 대목입니다. 다만 위 수치는 서울 전체이고, 길음동의 비율이 같았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셋째, 35년 사이 서울 가구 수는 약 2.5배로 늘었는데 연탄으로 난방하는 가구는 133만에서 4천 가구 남짓으로 줄었습니다. 2010년 기름보일러가 0.7%에 그친 것도 길음동에서 기름보일러 시대가 짧았던 것과 맞아떨어집니다. 서울연구원 자료에는 1991년 서울의 냉장고가 100가구당 106대였다는 수치도 있는데, 1980년대에 냉장고가 보편화되었다는 보고서 서술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석유곤로 시절의 부엌

보고서에 따르면 석유는 따로 파는 집에 가서 10리터씩 사 왔고 그 양으로 보름 정도를 썼습니다. 계산하면 하루 0.7리터 안팎입니다. 거의 모든 집이 석유곤로를 써서 석유를 사려면 줄을 서야 했습니다. 김창원 씨는 허가를 받아 석유를 파는 집이 동네에 있었고, 하얀 플라스틱 통에 사 와서 고무호스로 곤로에 옮겨 담았다고 기억합니다.

왜 전기나 가스가 아니라 석유였을까요. 1951년생 오복례 씨의 구술에 힌트가 있습니다. 그는 1980년 무렵 이사 오면서 가스레인지를 처음 들였는데, 부엌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집에서는 가스레인지를 "어디 놓을 데도" 없었다고 말합니다(2009년 6월 18일 구술). 전기도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1947년생 이완종 씨는 전등 한두 개만 쓰라고 한 전기에 전기곤로까지 꽂다 보니 툭하면 전압기가 탔다고 했습니다(2009년 4월 9일 구술). 길음동의 약한 전기 사정은 칠흑 같던 밤이 밝은 빛으로 - 전기 이야기에서 자세히 다뤘습니다. 좁은 부엌과 약한 전기 사이에서 통 하나만 있으면 되는 석유곤로가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다고 저는 봅니다.

전기밥통 이야기도 같은 맥락입니다. 오복례 씨는 전기밥통이 밥을 짓는 기계가 아니라 "따뜻하게 그런 쪽"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밥은 솥에서 짓고 전기는 보온에만 썼다는 뜻입니다. 전기를 아껴 써야 했던 시절의 가전다운 쓰임새입니다.

숫자로 환산하지 않은 이유

1975년 수도 공사비를 현재 가치로 환산한 글과 달리 이번 글에는 환산표가 없습니다. 보고서의 난방·조리 대목에 연탄 한 장 값이나 석유 10리터 값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격이 확인되지 않은 숫자를 추정해 넣지는 않았습니다. 길음동 생활사 전체 흐름은 주민 구술로 복원한 길음동 인프라·생업 연표에서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수정 기록

  • 2026년 10월 14일: 보고서 155~156쪽과 대조해 오타를 고쳤습니다(술방울 → 솔방울, 부협 아궁이 → 부엌 아궁이, 직접나 → 직접).
  • 같은 날: 기름보일러 등장 시기를 196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후반으로 바로잡았습니다(보고서 156쪽).
  • 같은 날: 연표, 구술 인용, 서울 통계 비교, 출처 섹션을 추가했습니다.

출처

구술자 이름, 출생연도, 구술 일자는 모두 위 보고서에 실린 표기를 따랐습니다. 직접 인용은 짧게 줄였고 나머지는 제 말로 정리했습니다. 표는 보고서와 서울연구원 자료를 바탕으로 직접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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